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인트 폴 대성당 (문단 편집) === 현재의 대성당 === 전소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구성된 왕립 재건위원회는 [[1669년]] [[7월 30일]] 크리스토퍼 렌에게 복구를 맡겼다. 그는 런던 대화재 이전인 [[1661년]]에 대성당 수리에 조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렌은 낙뢰로 파괴된 첨탑 자리에 돔을 얹는 재건축 설계도를 그렸다. 그 때마다 왕과 재건위원회에서는 좀 더 욕심이 생겨 렌에게 더 과감한 요구를 하였고, 결국 [[찰스 2세]]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아예 새 성당을 만들고 싶어했으므로 결국 기존의 성당은 모두 철거했다. 렌은 1672년 1673년까지 새로운 성당을 설계하였으며, 그것은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식 평면 구조인 [[바로크]] 양식[* 곡면으로 된 벽체에 코린트 양식 박공지붕으로 장식한 정면이 있었다.]의 성당이었다. 이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안이었다. 그리고 1년과 당시 돈으로 500[[파운드]][* 2019년 가치로 약 11만 6천 파운드, 1억 6천만 원 상당.]를 들여 길이 6 m, 높이 4 m에 달하는 커다란 목제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레이트 모델(Great model)'이라 불리운다. 돔을 8개의 중앙 아치와 기둥을 사용하여 지탱할려고 하였으며, 이는 돔을 보통 아치 4개와 벽체로 지탱하는 대륙의 바로크 건축의 관습을 거부한 렌의 독창적인 구조였다. 처음 [[찰스 2세]]나 재건위원회에서는 이 설계안에 찬성하였으나 곧 여론이 바뀌었고, (기록되지 않아서 현대의 우리들은 모르는) 어떤 이유를 들어 거부되었다. 이 모형은 오늘날 세인트 폴 대성당의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Wren283.jpg|width=380]]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Great+Model+(2).jpg|width=425]] || ||||<:> 그리스 십자가 평면의 첫 번째 설계도(左)와 이를 바탕으로 만든 '그레이트 모델'(右) || 다만 정황상, 종교적인 면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다. 후속 설계의 구조가 영국 교회의 전통적인 양식인 [[고딕]]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였지만 [[가톨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톨릭과는 정서적인 유대감이 있었고, 오히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대립하던 [[개신교]]와 거리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가 중시하는 교회의 중앙집중형 구조에 있는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사제들이 거부하였던 듯하다. 다만 [[가톨릭]]도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되었던 역사가 있다. 물론 이 성당도 결국 종교적인 이유로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버리고 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가 변경되었긴 하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성당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공간적인 매력 때문에 그리스 십자가 성당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렌이 마주한 영국 성공회의 사제들은 그리스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실망했을 것이 분명한 렌은 하는 수 없이 기존의 설계를 백지화하고 영국 교회의 전통인 높은 첨탑과 긴 라틴 십자가 평면을 따르는 [[고딕]] 분위기의 설계인 '워런트 설계(Warrant design)'을 1675년에 제출하여 승인받았다. 이것은 불타기 전 성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이 설계는 원형 첨탑과 152 m 긴 라틴 십자가형 평면(장당식)[* 또한 신랑의 중간쯤의 좌우에 짧은 수랑(교차랑의 남북양단 부분을 말함)을 내물리게 했다.]이라는 고딕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매우 낮은 [[돔]]과 중앙 아치 8개와 기둥으로 구성되는 최소한의 중앙집중형 공간을 만들되 정면 등의 외형은 [[바로크]] 양식을 혼용하였다. 또한 고딕식 성당의 중요 요소였던 플라잉 버트레스를 싫어했던 렌이 쓰지 않았고 천장의 높이는 옛 세인트 폴 대성당보다 낮아졌다. ||<:> [[파일:external/www.stpauls.co.uk/G74.jpg|width=580]] || ||<:> 왕립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두 번째 설계도. 일명 '워런트 설계(warrant design)' || 그런데 돔은 문제가 안되었는지 렌은 곧 첨탑을 다시 거대한 돔으로 바꾸고, 내부 천장을 리브 [[볼트]]에서 작은 돔형 천장의 연속으로 바꾸는 등 이전 그레이트 모델의 요소를 추가한, ~~이름만~~ '최종 설계'(Definitive design) 안을 같은 1675년에 제출하였는데, 이건 또 승인받았다(...). 이후 렌은 10년 동안 이 설계로 공사를 진행했다. 이후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즉위한다. 이 왕은 [[가톨릭]]교도였지만 종교적 관용과 왕의 권위 상승을 위해 이 성당의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고, 재건위원회를 갈아치우고 재정을 확충해주었다. 넉넉한 재정 덕분에 렌은 기존 성당 설계안에서 돔을 더 높이고, 서쪽 정면에는 쌍 첨탑을 올렸으며, 성당의 2층에는 가림벽을 세워 가려놓아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외형으로 바꾼 '개정된 설계(Revised design)'를 제출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성당의 고딕적 분위기를 다 제거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2층 가림벽 안에 구조적인 이유로 플라잉 버트레스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은 제임스 2세가 가톨릭 교도라 이에 거부감이 없었는지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예혁명]]으로 쫓겨났지만, 재건위원회가 갈려서 그런지 이후에도 렌은 이 설계로 계속 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만 정작 돔을 건축하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중앙에 거대한 돔을 세우지 않는 설계로 시작한 건물이었는데, 렌이 거대한 돔을 세우기를 계속 고집하였기 때문에 돔을 만들면 그 무게가 건물에 무리를 많이 줄 것이 뻔하였다. 10년 동안 이미 많은 부분을 지은 뒤라 아랫 건물의 설계를 크게 바꿀 수는 없었으므로, 위에 있는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목조 구조를 혼용하여 가볍게 만든 3중 구조 돔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돔의 외형은 원래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과 비슷했지만, 최종적인 외형은 [[브라만테]]가 설계한 작은 신전인 '성 베드로 템피에토'를 본따 만든 듯한 외형이 되었다. [[1675년]]에 첫 번째 돌이 놓여지고 나서 [[1708년]]에 마지막 돌이 얹혀졌고, 영국 의회는 [[171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대성당 건설이 마무리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1716년]] 집계로 109만 5556[[파운드]]에 달했다. 완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즐비한 영국에서 성공회의 본산인데도 [[돔]]을 얹은 희귀한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은 고딕 양식의 평면을 가진 하부 위에 바로크 양식의 돔과 외형이 결합된 절충적 건축물이 되었다. 다만 이 건물이 고딕-바로크의 절충적인 구조라고는 하지만 긴 길이의 라틴 십자가형 평면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여지는 형태는 바로크 양식으로 통일되었다. 중앙 크로싱을 누르는 압도적인 원형 돔의 비율은 렌이 처음 그린 원안의 정신이 반영되었다. 정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정면에는 그리스 신전풍 기둥들과 삼각형 박공 지붕이 단정하게 있고, 그 좌우에 건설된 쌍 탑의 화려한 형태는 엄격한 고전적 질서와 화려함을 동시에 추구한 바로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파일:attachment/1921_saint_paul.jpg|width=600]] || ||<:> 공중에서 본 모습 || 결국 고딕적인 구조는 숨어있게 되었다. 지면에서 본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습은 바로크 양식이지만 가림막인 2층의 가짜벽에서 창문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실제 창문이 아닌 조각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를 추한 형상으로 보았던 렌은 가짜 벽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이를 가리려 한 것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의 시각에서 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혐오스럽게 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높은 벽을 지탱하기 위해 억지로 사용된 미봉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중 돔 구조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가짜 벽을 보면 진실된 구조라는 시점에서 볼 때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진다.] 크리스토퍼 렌은 성당을 설계하면서 오락가락하는 왕실과 교회의 직위 높은 돌대가리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압력을 견뎌내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건축업자들 사이에서는 교회 등의 종교건축물을 함부로 수주하지 말라는 격언(?) 같은 게 있다. 종교적 관점이 가미돼서 무조건 고칠 수밖에 없는 이런저런 재시공 요구가 끊임없이 들어온다.] 그래서 그런 그가 이후 엄청나게 장수한 것(90살)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던 듯. 참고로 [[성 베드로 성당]]에 참여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이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끔찍하게 고생하고도 16세기에 88살까지 신기하게 장수한 경우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단 한사람의 건축가의 책임 아래 건립된 대성당이라 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렌이 장수한 덕에 공사의 설계부터 완공까지 '''살아서''' 직접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한 세기 뒤, 오귀스트 드 몽페랑이 [[성 이사악 대성당]]을 설계해 40년 동안 공사한 끝에 완성함으로써 렌의 뒤를 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s5.wikiart.org/the-river-thames-with-st-paul-s-cathedral-on-lord-mayor-s-day.jpg|width=750]] || ||<:>런던 시장 취임일의 [[템스 강]]과 세인트 폴 대성당, 카날레토, 1746년경, 26.8 x 37.6cm, 캔버스에 유채, [[체코]] 로브코비츠 콜렉션 ||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풍경으로서 화폭에 즐겨 담기기도 했다. 이 성당은 BT타워가 지어진 [[1962년]]까지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